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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선교를 위한 피어선의 유산 -다이나 로버트 교수
arm  2005-04-24 19: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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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85


다이나 로버트 교수
(美 보스톤대학교 선교학 교수)


로버트 박사는 먼저 주장하기를, 오늘날 세계선교를 위해 피어선 박사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1911년 작고한 후에 그의 유지를 따라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현재의 평택대학교로 발전한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을 1912년에 서울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50여권의 저서를 기술한 학자요, 13,000여 편의 설교를 하였으며, “세계선교논평”이라는 월간지의 편집인으로, 그리고 성경교사로 세계적인 평판을 가진 피어선 박사는 결혼 50주년과 목회사역 50주년을 기념하여 1910년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는 선교여행 중에 일본에서 병을 얻었으나 12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6주간을 머물며 성경 강해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인들의 열성에 감동한 피어선 박사는 서울에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Institute)”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다양한 민족들이 복음적인 성경훈련을 받아서 그의 동족을 전도하고 궁극적으로는 해외선교에 헌신해야 한다고 믿고 주장해 왔으며, 미국 안에서 이미 최소한 9개의 다른 성경학원을 세우는 일에 관여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추수 때가 가까워서 세계선교를 위해 교파 안에서의 선교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선교’ 그리고 초 교파적인 성경학원을 통해 많은 일꾼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피어선 기념성경학원의 설립은 그의 오랜 주장의 결실로 의미가 있다. 1911년 질병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작고한 피어선의 유지를 따라 설립된 “연합성경학원”은 초기에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함께 지원하여 교단 신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예비성경학원으로 시작되었으며, 1917년에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건립된 후 학교명을 피어선 기념 성경학원으로 바꾸었다. 21세기인 오늘날, 비록 그 이름이 학교의 발전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바뀌었지만, 성경훈련을 통해 한국인을 선교사역에 헌신하도록 하고자 하는 피어선의 선교비전은 평택대학교 안에 유산으로 계속되고 있다.

둘째로 피어선은 장로교인이었던 부모의 영향 하에 경건한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피어선은 1860년 뉴욕의 13가 장로교회에서 전도자로 안수 받은 후에 빙헴톤에 있는 회중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민주주의와 개신교는 함께 가는 것이며,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야말로 좋은 정부와 인간평등을 위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기초라고 믿어서 남북전쟁에서 노예해방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하였다.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호트 스트리트 장로교회에서의 목회는 기존의 부유한 계층교회 안에서의 도시빈민들을 위한 선교문제에 대한 피어선의 목회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피어선은 오페라극장을 빌려서 16개월 동안 복음송가를 채용했으며, 유연한 예배형식을 따른 복음전도를 위한 예배를 실험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지난 16년 동안 전도한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있었다. 과거에 그는 후 천년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라서 사회변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되리라고 믿었으나, 고아들의 아버지로 알려진 죠지 뮬러와의 교제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후에야 참된 하나님의 천년왕국이 건설된다는 전 천년주의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피어선의 필라델피아 베다니 장로교회에서의 목회는 그가 꿈꾸던 도시선교목회의 전형이다. 백화점 왕 죤 와나메이커 등이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주일학교로 시작한 노동계층을 위한 이 교회에서 피어선은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사회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미국 도시 안에서나 외지의 선교지 에서나 교회의 사역은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것”이라는 “선교 목회관”을 잘 보여준다.

셋째로 피어선 박사의 해외선교에 관해 살펴보면, 피어선은 1885년에 드와이트 무디의 여름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계선교의 문을 여시는가?” 하는 문제로 기도하며, 과거 선교사 윌리암 케리가 주장한 것처럼 매 10년마다 모든 개신교의 선교단체들이 모여서 좀더 조직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선교의 위기”라는 책을 저술하여 “교회가 복음증거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남지 못하게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해외선교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피어선의 업적은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에 관여한 것이다. 그는 “모두가 해외선교를 위해 가야하며 또한 모두를 위해 가야한다”라고 주장했으며 “그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해야 한다”라는 비전을 심었다. 동시에 그는 “세계선교논평”이라는 월간지의 편집인으로 선교지의 소식, 세계선교상황의 매년 통계분석, 서평들, 그리고 자신의 사설을 실었다. 이 책은 19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복음주의 역사의 자료라고 오늘날 평가된다. 1888년에 1,600여명의 세계선교사와 지도자들이 영국에 모인 “세계선교 100주년 모임”에서 피어선은 세계선교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하였으며, 이 강연이 영국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고든대학교와 고든-콘웰신학대학원의 전신인 “보스톤 선교사와 성경훈련원” 초대원장이었던 고든박사와 같이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게 되었다. 1890년대에 피어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장막교회를 목회 하던 설교 왕 찰스 스펄전 목사의 후임으로 2년 동안 설교하였다. 피어선은 60대가 되고 질병으로 몸이 약해지자 케스윅 대회의 영적인 강사로 새로운 헌신의 길을 걸었다.

마지막 4번째로, 오늘날 선교를 위한 피어선의 유산을 살펴보면 첫째로 피어선의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적인 선교관을 들 수 있다. 그는 유럽, 영국, 그리고 전 세계를 통한 선교 “네트워크”를 통한 참된 세계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피어선은 미국의 선교사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본토민 선교사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오늘날 우리는 세계 각국에 복음주의 기독교가 퍼져있는 모습을 통해 그의 꿈이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본다. 두 번째로 살필 것은 학생자원운동의 결과이다. “모두가 해외선교를 위해 가야하며 또한 모두를 위해 가야한다”라고 주장했으며 “그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해야 한다”라는 피어선의 비전은 오늘날 기독학생운동으로 계속된다. 세 번째로 살필 것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여성사역에 대한 그의 선각적인 태도이다. 당시에 그는 여러 책과 기고문을 통해 교회 안에서의 여성문제에 대해 대단히 진보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는 세계선교를 위한 천년왕국적인 긴박성 때문에, 성령님의 사역을 교육수준, 성별, 또는 공적인 안수 등의 지엽적인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게 보았다. 네 번째로 살필 것은 선교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이다. 그가 설립하고 관여했던 여러 신학교육기관들(고든-콘웰 신학대학원, 바이올라 대학교, 나약대학, 무디 성경학원 그리고 평택대학교등)이 20세기 뿐 아니라 오늘날도 그의 정신을 따라 선교의 종합센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참고자료: 피어선 박사에 관한 데이나 로버트 박사의 박사학위논문 중에서 발췌되어 평택대학교 피어선 기념 성경연구원에서 발간한 “피어선의 생애와 사상”에 실린 내용으로 본 강연과 관계 있는 부분을 가능한대로 강연의 내용을 따라 정리하였음




피어선 박사는 목회 50년 동안에 13,000번 이상의 설교와 강연을 했으며 50권 이상의 책을 썼고 추가로 무수히 많은 소책자와 시, 노래, 종교적인 간행물을 위한 팜플렛과 기사들을 썼다. 그는 그의 일곱 자녀들이 선교사 된 것을 늘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장녀 헬렌은 프레드릭 커티스와 결혼해서 일생토록 일본에서 선교하였다. 딸 로라는 아메리칸 인디안들과 함께 일하였고, 안나와 에디스는 뉴욕시와 필라델피아에서 여성정착 사업에 종사하였다. 훗날, 안나는 파푸아뉴기니아에서 1년간 일한 적도 있었다. 장남 델러반은 부친과 함께 「세계선교 논평」지를 위해 일하였으며, 차남 패런드는 의사로서 건강의 손상으로 일 을 그만둘 때까지 중남미에서 선교사로 일하였다. 1864년생 루이스는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1903년에 죽었다. 루이스는 뉴욕주 포우?시에 소재한 YMCA와 매사추세스주 로웰 YMCA에서 비서 일을 하다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선교회인 여성연합선교회 산하에서 자원봉사를 하였다. 그녀는 인도에서 빈민층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해 일하다가 장 티푸스열병으로 죽었는데, 피어선의 가족은 그녀를 기념해서 중부 인도 누공에 기념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아더 피어선은 1910년 10월 19일 병약해진 몸과 여러 가지 부담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극동을 향한 선교 여행을 계획하였는데 일본, 한국, 중국, 시암, 인도, 미얀마, 실론 및 이집트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도착할 무렵부터 바다여행이 춥고 거칠었던 관계로 피어선 목사는 병이 몹시 심했으나, 여러 차례의 강연을 강행하였다. 한국으로 와서 한 달 여간 선교사들을 위한 성서 강해를 하는 중,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피어선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의 사도적인 특성과 희생정신 그리고 성서 연구에 대한 갈망을 보고들은 피어선은 고국에 가서 친구들의 협조를 받아 한국 땅에 성서 학교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고국에 돌아갔으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피어선 목사는 1911년 6월 3일 오전 8시, 결국 그리스도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영혼이 떠난 얼굴 위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다. 장례식은 뉴욕의 부룩클린에 있는 베드포드 장로교회에서 수많은 회중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거기에는 그에 대한 칭찬의 말보다 그의 주님에 대한 찬양이 있었을 뿐이다. 중국 대륙 선교회의 회장인 헨리 W. 프로스트는 그 장례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장례식은 내가 참여했던 어느 장례와도 같지 않았습니다. 모든 친구들의 생각과 표현 속에는 찬양이 지배했습니다. 그 장례의 진행과정과 싸움은 다른 방법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질서 정연하고 고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각될 뿐이 었습니다.?

그의 육신은 그린우드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무덤에 놓인 비석은 순전한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그 위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진 지구의가 놓여 있으며, 앞에는 대위임 명령의 성구와 영생의 희망의 말씀이 새겨진 성경이 펼쳐 놓여 있었으며 그 속에 다음과 같은 성경 귀절이 새겨져 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 15)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 5 : 11)

아더 T.피어선의 사후에 한국 땅에 성서학교를 세우겠다는 그의 약속을 따라 친구들이 협조하여 서울에 성서 학교를 세웠으니 이것이 현재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연합성경학원이다. (1912. 10. 15 : 후에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명칭이 바뀜)




1. 피어선과 도시목회




아더 T. 피어선의 조상중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분은 뉴왁시(Newark)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아브라함 피어선이다. 인정 많은 주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뉴왁 (Newark) 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은 목사의 출생지인 영국의 Newark-on-the-Trent의 지명을 따라서였다. 코넥티겉주 브랜포드(Branford)에서 피어선 목사를 따라 이사온그들은 엄격한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 청교도이었는데 신정주의(神政主義)원칙에 입각한 첫 교회를 창립하였다. 즉, 교인이 아닌 사람은 투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 피어선 목사의 아들 아브라함 피어선2세 역시 목사였는데 예일대학교 (Yale University)의 설립자중의 한 분인 동시에 초대총장을 역임하였다.

아더 T. 피어선의 부친인 스티븐 피어선(Stephen Haines Pierson) 은 장로교의 장로로서 열 명의 자녀들을 장로교인으로 길렀는데, 아더 피어선은 주일이면 스프링가 장로교회의 교회학교에 다녀야만했다. 스티븐 피어선과 그의 아내 셀리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기독교 사립학교에 보냈는 데, 아더 피어선의 나이 열한 살 되던 1848년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Mount Washington Collegiate Institute)에 등록을 했다. 피어선은 그곳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워 열두 살 되던 때부터 희랍어 신약성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열세 살 되던 해 그는 뉴욕시 테리타운 언더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에 입학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문의 능력과 시, 음악, 어학, 그리고 화술에 있어서 움트기 시작한 재능은 부모들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아더 피어선을 대학예과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을 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아들을 테리타운으로 떠나 보낼 때 아더 피어선의 부친은 아들에게 생활표어로 잠언 3장 5절과 6절의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를 주었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설립목적이 젊은 학도를 교육 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당시 그의 문학성적은 뛰어났고, 교지 편집을 맡기도 하였으며, 웅변 또한 남달리 잘하였다.?젊은 세대는 날이 갈수록 증가일로에 있는 술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평론시합에 참가한 아더 피어선은 550명의 경합자 중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열 다섯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피어선은 1852년 5월 28일 멀서가(Mercer St.)에 있는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백인계 무역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도의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당시 영국인 조직인 YMCA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뉴욕 청년대표들을 포함한 백 명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53년, 아더 피어선은 뉴욕주 클린턴(Clinton)에 있는 해밀턴(Hamilton)대학에 입학하였다.

도시생활을 떠나서 학교생활로 돌아간 피어선은 목회를 위한 준비계획을 염두에 두게 되었는데, 재학 중 피어선은 시작과 수사학과 어학에 몰두했다. 동료 젊은 시인이던 토마스 베일리 알드리히(Thomas Bailey Aldrich)는 피어선의 시를 높이 평가해줌으로 해서 피어선의 문학적 포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피어선의 고전적 시 형태는 그의 종교교육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경건이 넘쳤다. 그의 시적 감각은 생생한 작품표현에 반영이 되었을 뿐 더러 수준 높은 선교에 관한 저작에도 잘 나타나있다. 피어선이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857년이었다. 그는 거기서 문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詩)기고란 외에도 헨리 비쳐(Henry Ward Beecher)가 창간한 「표준과 독립」(The Standard and the Independent)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기고하였다. 신학교 재학시절에 피어선은 사라 프랜시스 베네딕트(Sarah Frances Benedict)양과 약혼하였으며, 그 후 1860년 7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피어선 부인은 별로 말이 없으면서 조용하고 신앙이 깊은 분으로 그녀의 생애를 남편과 가정을 섬기는 일에 전부 바쳤다.

피어선목사 부부는 해외여행 때에 늘 동행하였다고 하며, 50년 간의 결혼생활은 한결같이 행복하였다. 피어선은 가정생활 및 유능하고 지성을 지닌 여성들에 관한 글 가운데서 그의 아내를 존경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성을 높이고 있다. 50권이 넘은 저서와 수천 편에 달하는 논설, 그리고 중요 월간지의 편집, 게다가 강연 및 여행까지 겸해서 생산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사라의 적극적인 내조의 덕분이었던 것으로 본다. 결혼 때에 찍은 피어선의 사진은 마른 몸집이었으나, 강한 인상을 준다. 피어선은 장년시절을 통해서 수염을 길렀고, 남다른 이마와 주시하는 눈매, 그리고 뒤로 넘긴 머리 결이 인상적이다. 아더 피어선 목사 부부는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1860년 피어선은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미국의 철학과 신학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촉망되는 젊은 설교자로 코넥티? 주 웨스트 윈스?(West Winsted)에 있는 회중교회의 임시교역자로 부임했다. 피어선이 설교자 인허를 받은 것은 1860년 4월 3일이었다. 장로교회 담임목사였던 사무엘 벌차드 (Samuel D. Burchard)박사는 피어선으로 하여금 목회훈련을 충실히 받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피어선은 1860년 5월에 뉴욕시 제3 노회에서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860년 여름 아더 피어선은 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는데 그 중에 뉴욕주 빙햄턴(Binghamton)에 있는 제일회중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였다. 시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피어선은 제일회중교회의 재정적 곤란 때문에 빙햄턴에서의 일자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863년 8월 그는 뉴욕주, 워터포드(Waterford)시에 있는 장로교회에 부임하여 1869년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명성이 더해감에 따라 피어선은 여러 이름 있는 장로 교회들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는데. 1869년 2월 미쉬간 주의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영향력 있는 호트 스트리트 장로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피어선은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회중교회의 목사들로 구성된 디트로이트 목회자 연합회에 가입하였다. 또한 그는 디트로이트 YMCA에 적극 참여하면서 생각하기를 YMCA야 말로 교회의 초 교파적인 병기로써 청년들을 양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어선은 디트로이트 기독교청년 연합회를 위한 건물과 체육관 구입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동안 임시건물에서 성서연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디트로이트 목회 기간 동안 피어선의 가장 보람 있는 에큐메니칼 활동은 복음주의 연맹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피어선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외에 장로교단 일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1872년에는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1875년 피어선의 나이 서른 여덟 되던 해에 피어선은 미쉬건 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피어선은 1876년을 제외하고는 1870년부터 1882년까지 해마다 디트로이트 노회 총대로 미쉬건 대회 연차회의에 참석하였다. 설교가로서의 그의 평판은 미쉬건 대회에 참여한지 불과 2년 만에 주 강사로 선출되리만큼 되었다. 피어선은 미쉬건 대회 안에서의 역할을 통하여 미쉬건 주 전체의 장로교 고등교육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는데, 1873년 미쉬건 대회 는 그를 칼라마주(Kalamazoo)에 있는 미쉬건 여자 신학교의 이사로 선출하였고, 그때부터 줄곧 50년을 봉사하였다. 피어선의 장로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복음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작용하였는데, 반노예제도, 행동주의 및 낙관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의 입장을 회고해볼 때 피어선은 올바른 지식과 기독교에의 회심이 기독교 문명을 창출해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디트로이트에 부임한지 2년 만에 디트로이트 노회에서 피어선은 1871년도 총회총대로 선출되었는데, 총회 회기 중 피어선은 신학교위원회 위원으로 동시에 노스웨스트신학교이사회 이사로 지명되었다. 그는 14년 간을 신학교 이사로 봉직하였는데 1885년 필라델피아로 목회지로 옮기고 나서 사임하였다. 그의 이사 재 임기간 중 노스웨스트 신학교는 학생 수나 교수진에 있어서 극적 증가를 보았다.

그러나 피어선이 디트로이트에서 경험한 도시 빈민의 문제는 그의 목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영적 위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이지 못한 상태를 보면서 미국사회를 탓하기에 앞서 피어선은 자신을 책망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일에 실패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믿음의 부족과 지나친 ?문자적?신학으로 인하여 많은 회심자를 얻지 못한 것을 탓하였다. 피어선의 회심의 접촉제는 시카고 출신의 D. W. 휘틀(Whittle)과 성악가 폴 포터 블리스(Paul Porter Bliss)가 인도한 4주간에 걸친 부흥집회였다. 휘틀과 블리스에게 피어선이 배운 것은 단순한 복음선포가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문학적 형식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피어선은 블리스의 부흥 음률에 맞는 여러 편의 가사를 작사하였으며, 회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예배에 있어 가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한달 동안 피어선의 가족은 전도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영성과 마음의 평화에 깊은 감명을 받게되었다. 뉴욕시에서 전개된 자유 교회운동을 통하여 보여준 찰스 휘니의 지도자 상은 피어선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때부터 피어선은 안락한 교회생활의 남용을 지적하고,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평이한 설교를 시도하였다.

호트 스트리트 교회로 하여금 디트로이트 시내 가난한 도시인들에게 문을 개방토록 하기 위하여 찰스 휘니의 생애에 대한 계속 강의를 착수하던 1876년 3월 24일 금요일 저녁, 피어선은 기도하러 모인 60-70명 가량의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 밤 피어선이 그곳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교회가 이기적이고 능력이 결핍되어있다고 말했을 때에 모인 교인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도의 응답에 관한 성서 구절들을 찾아 읽어가던 중, 전에 없던 행동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곳에 모인 교인들이 무릎을 꿇고 호트 스트리트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목회에 놓인 어떤 방해라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6시경 그 웅장한 교회당은 불길에 쌓여 삽시간에 타버리고 종탑은 길을 가로질러 쓰러졌다. 피어선의 장서도 전부 소멸되었으나 설교원고는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구제되었다. 피어선에게 당시의 화재와 설교원고의 구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신호였다. 화재가 난 그날 피어선은 예배 장소로 휘트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교섭하고?복음성가?300부를 구입하였다.

오페라 하우스는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을 갖춘 디트로이트시의 밤 생활에 있어서 중심이었던 것이다. 화재 다음 날이 주일이어서 피어선은 설교를 준비할 시간을 얻지 못해서 즉석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목사실 책상에 두었던 설교원고의 소실로 인해 피어선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휘니의 생애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그 날부터 피어선은 설교원고를 의존한 설교를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거행된 예배는 초만원을 이루었고 장소가 좁아서 저녁집회 때에 돌아간 사람이 천명에 달했다. 기도를 요청하는 사람의 수가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오페라 하우스에서 16개월 간 예배를 실시하는 동안에 디트로이트 시는 굉장한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 16개월 동안에 회심한 수는 피어선이 지난 16년에 걸쳐 이루어낸 회심자 보다 많았다. 즉, 294명이 신앙을 고백하고 포트 스트리트 교회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피어선은 당회원들에게 예배 때에 지정석을 별도로 배정하지 말고 누구나 앉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교인들에게 자유 좌석제를 권하였고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지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어디서나 교회에 출석할 수 있도록 하자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디트로이트 일반 시민들이 오페라 하우스의 자유석에 몰려들므로 해서 일반대중을 이끄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언론들은?대부흥?이라고 표제를 달아 취급하였다. 피어선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원리, 죄와 구원, 하나님께 순복하고 죄를 뿌리뽑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 다운 생활의 필요성들에 관하여 설교를 하였다. 피어선의 설교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황금시대 동안 많은 미국인들이 영적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어선은 일정한 봉급에 의존하기보다는 기도에 매여 달리는 죠지 뮬러의 선교방법을 많이 취하였는데 그는 교회가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봉급을 억제하는 요청을 함으로써 지정좌석제의 필요성을 종식시켰다. 피어선은「브리스톨의 죠지 뮬러」라는 자서전을 집필한 후 그 책을 모든 선교사들에게 무료로 배부하고 자의로 기부하였는데, 그 책이 출판 된지 2년 안에 8천 권에 달하는 수량을 무료 배부한 셈이었으며, 5개국어로 번역 되 었다. 피어선의 디트로이트 목회의 하반기의 주된 목표는 그 도시의 노동계급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사용 몇 달만에 포트 스트리트 장로교회는 변해갔다. 낯선 사람들을 교회로 영접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등 디트로이트시의 선교사업을 관장하였다. 불기둥?에서 피어선은 교회의?성서적 원칙?을 제시하면서,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가난하면 할수록 교회의 책임은 큰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교회의 무 변화는?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요구?를 상실하는 원인이 됨을 그는 지적하였다. 그는 호트 스트리트 교회가 소년들을 위한 산업원을 설립해서 거리의 가난한 소년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고 그들을 교육시켜서 고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피어선은 인디애나폴리스의 제2장로교회로부터 거듭 간청을 받고, 아울러서 도시복음화의 프로그램은 피어선의 손에 자유롭게 맡긴다는 약속을 받고 1882년 7월 19일부터 13년에 걸친 호트 스트리트 장로교회의 목회를 사임하였다. 20년 이상의 목회경험에, 널리 알려진 인물에, 인생의 절정기에 들어선 피어선은 정열적으로 새 목회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구상대로 이상적인 교회를 구상해보려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도시빈민을 향한 공세적인 목회를 추진하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제2장로교회 교인들은 그들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큰 성전을 건축해서 빈민을 수용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 차이로 9개월 간의 험난한 목회를 마지막으로 아더 피어선은 1883년 5월에 인디애아폴리스 교회를 전격적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인디애나폴리스 체재가 비록 짧기는 하였으나 피어선의 인기와 평판은 온 도시에 퍼졌다.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YMCA에서 영성반을 지도하였으며 기독교 변증에 관한 강의도 하였다. 그는 여러 목사들과 친근한 교분을 가진 중에도 후일 미국 침례교 선교연합회의 국내 총무를 역임한 헨리 C. 마비(Henry C. Mabie)목사와 가깝게 지냈다. 1882년 5월 밀워키에서 개최된 YMCA 25차 국제대회에 강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매주 목요일 제2 장로교회 집사회가 발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한 설교」지에 게재되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목회자로서 비참한 고배를 마신 피어선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베다니 장로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 수락하였다. 이곳이 피어선 에게는 교구목회로서 가장 성공적인 목회지였다.

1883년 여름 피어선은 기독 실업인 죤 와너메이커(John Wanamaker)가 남부 필라델피아에 창립한 주일학교와 관계된 베다니 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10월부터 필라델피아에서의 목회를 시작하였다. 피어선과 와나메이커 두 분은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지한 성서적 보수주의자들로서 처음부터 베다니 교회 및 주일학교의 장래와 목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졌다. 피어선이 시도한 첫 번째 일은 주일학교 교사 반을 조직해서 그들로 하여금 교과를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처럼 피어선의 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인기가 있어서 도시 안에 있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총망라해서 참여하였다. 목회 기간 중의 베다니 교회 역사는 피어선을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성서교사의 한 분으로 증거하고 있다. 피어선은 1883년 9월에 교회협의회를 창립함으로써 베다니교회의 구조를 민주화하였으며, 예배에 있어서도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피어선이 부임하기에 앞서서 베다니 교회는 이미 복음찬송를 부르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피어선은 P. P. 블리스와 같이 복음찬송을 작시하기 시작한 1874년이래 줄곧 복음찬송을 애송하였다. 복음찬송은 19세기 후반 미국교회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두와이트 무디, D. W. 휘틀, R. A. 토레이 등 위대한 부흥사들의 설교도 복음찬송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귀에 심금을 울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피어선은 장로교 찬송가 작가로서 정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피어선 목사는 형식적인 기독교 고전음악은 회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꺼려하였고 유급 성가대를 반대하였다. 그가 작곡한 여러 편의 찬송이「복음찬송가」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찬송가책 중 하나였다. 피어선은 1884년 1월 13일 베다니 교회가 성가대 제도를 폐지하고 쉐니교수가 지도하는 순수한 회중찬 송 합창을 채택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1894년에 피어선은 A. J. 고든과 같이 복음찬송가인「대관식 찬송」 (The Coronation Hymnal)을 공동편찬 하였다.

피어선이 베다니 교회에서 행한 주목할만한 활동으로는 양재학원, 백색리본군대 및 동전저축은행 등이 있다. 1884년 12월에 조직된 백색리본군대는 어린이 절제운동조직이었다. 1888년에는 베다니 교회 아래층에 첫 동전저축 은행이 문을 열었다. 동전저축은행의 취지는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저축하는 생활을 권장하는 데에 있었다. 피어선이 장려한 그 밖의 활동으로는 기도회, 숙녀후원회, 남성문서선교회, 청년회 및 선교회 등이 있었다. 1884년 피어선은 전도단을 조직하고 도시선교사업을 착수하면서 도덕 및 절제생활운동을 펴나갔다. 1884년 10월 필라델피아 노회는 필라델피아에 부임해 온지 1년도 채못되는 피어선을 2회에 걸쳐 6개월 임기의 노회장과 외지선 교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피어선은 베다니 교회를 사임하던 1889년까지 외지선교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선교위원장 역임기간 중 피어선은 장로교 대회에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노회 안에서 뿐 아니라 노회 밖에까지 강연과 집필을 계속하였었다.




2. 해외선교




1886년 7월 헐몬산 100명 선교사 지원자 대회 때에 아더 피어선이 외지선교를 위해 설교한 장문의 호소문인 「선교의 위기」가 책으로 출판되자 그의 호소문은 개신교회의 입장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뻗어나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하나님의 섭리를 쫓아 미국에서 인도, 중국, 일본, 한국, 터키, 멕시코,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남해군도, 그리고 카톨릭의 유럽에까지 미치게 되었다.「회중 교회주의자」(The Congregationalist)는 피어선의 저서를 가리켜?외지선교 뿐만 아니라, 국내선교의 동기를 제공한, 지금까지 저술된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이다. 이 책은 도서관마다 집집마다 반드시 비치 돼야할 것인데, 반드시 읽고, 연구해서 마음에 새기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선교의 위기」 일명, 「구름에서 들려온 음성」은 영국에서도 널리 읽혀졌으며 불어와 독일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 책은 그로 하여금 외지선교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의 신임을 확립케 해주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피어선의 외침은 그의 선교에 관한 두 번째 저서 1887년에 출판된「복음사역의 원리와 실제」 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피어선에 의하면, 개인회심은 그 개인이 가난에 찌들린 필라델피아이건 아프리카의 ?이방인?이건 간에 개인과 사회를 위해 보다 새롭고 나은 생활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회심을 사회발전의 매개체로 간주한 것이다. 피어선의 세계전도 방법론은 디트로이트와 필라델피아 등 내륙도시에서 가진 자신의 목회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경험을 통해 피어선 목사는 쉬운 설교, 가난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정도의 시설,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복음찬송, 연구모임, 주일학교, 절제운동, 그리고 가정심방 및 교인간의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대중의 복음화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동질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 피어선의 주장이었다.

1889년, 침례를 다시 받은 문제로 베다니 장로교회를 사임하고 나서 장로교 목사로서의 피어선의 목회는 사실상 끝을 맺은 셈이었다. 그 후 7년 간 피어선의 생애에 있어서 주목표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서유럽의 개신교도들에게 외지선교를 장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순회설교자로서 활약하면서 선교활동을 위한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는 세계의 복음화와 기독교화의 목적을 위한 에큐메니칼적 협력을 독려하였다. 피어선의 감동적인 열변은 청중들의 선교열의를 불타게 하였는데, 특히 스코트랜드의 열기를 북돋우었다. 그는 세상을 영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 영국과 미국의 연합을 통한 장엄한 십자군 결성을 촉구하였다.

1891년 10월 피어선목사 내외는 챨스 스펄전이 시무 하던 런던의 메트로폴리턴 테버나클 교회에 청빙 되었다. 그곳의 첫 설교는 사도행전 10장 20절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회중은 피어선의 설교를 칭찬하면서 저마다의 구원을 갈구하였다. 몇 달이 지나면서 그의 설교는 더욱 유명해졌다. 피어선이 테버나클 교회에 부임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부흥이었는데 기대했던 대로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군중은 줄어들지 않은 채 하나님의 집을 메웠으며, 성숙의 기쁨은 바다 건너온 설교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스펄전의 전기작가들은 평하기를,?피어선은 교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그들은 테버나클 교회당을 계속 메웠다?고 하였다. 테버나클 교회에서 행한 피어선의 설교들은 주간지에 실렸고, 여러 설교집, 이를테면「복음의 언덕」(The Heights of the Gospel),「복음의 심장」(The Heart of the Gospel), 그리고 「복음의 소망」(The Hopes of the Gospel)등에 나와있다. 어떤 관찰자는 피어선과 스펄전을 비교하면서 피어선에 대해 말하기를, ?무덤에서 살아난 키 크고 여윈 청교도?라고 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진지하고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동일하였으나 피어선의 설교는 마음에 닿는 엄장한 영국인 이었던 스펄전에 비하면 훨씬 지성적이고 짜임새가 있었다. 테버나클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피어선은 영국 전역으로부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그의「세계선교 논평」지의 편집인 위치 및 선교에 대한 사명은 영국 선교단체들에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피어선 목사는 1892년「세계선교의 논평」지를 윌리엄 케리를 추모하는 특집으로 바쳤으며, 같은 해 6월말 메트로폴리탄 테버나클 교회에서 6천명의 청중을 향해서 고별설교를 한 후 가족과 노모가 기다리는 미국의 집으로 돌아왔다.

피어선은 선교운동을 복음화의 진영이냐 아니면 문명의 진영이냐, 성(聖)이냐 아니면 속이냐,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전 천년설이냐 아니면 진보주의냐로 분산하지 않고 가능한 한 중립적 위치에 서려고 애썼었다. 그러나 1890년 후부터 피어선은 신학적 다 양성에 대한 자신의 온건하면서도 종립 적인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93년 세계박람회에서 노출된 신학적 다원주의가 피어선을 놀라게 하였으며, 복음주의 적 신학과 에큐메니칼적 관용간에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더 피어선은 그의 생애 마지막 15년 간을 평신도 성서연구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등비평이 주장하는 지성주의와 불경건을 거부하고 나섰다. 전 천년주의 성서강해자의 주역이 되어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성서에 굶주린 학생들을 양육하였다. 20세기 근본주의운동은 평신도 성서연구와 성결신학 및 현대사회 모습에 대한 전 천년주의적 비관론의 복합에서 태동하였다. 아더 피어선은 오래지 않아서 진실한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근본주의 운동을 특정 짓게 된 분파주의와 편협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성서강해에 관한 저술 및「스코필드 관주성서」(Scofied Reference Bible)편집은 근본주의 운동에 공헌을 끼쳤다.

피어선은 그의 지난날의 목회생활을 통해서 성서 강해자로서의 명성을 이미 확보해 놓았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강화함으로써 국제적 성서 강해자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대개가 선교 에 관한 것들인데 반해서 1895년 이후의 저술의 대다수는「세계선교 논평」를 제외하고는 영적 생활과 성서연구 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점이 선교에서 케스윅 영성운동 및 성서강해로 옮겨간 것은 선교단체들 간의 신학적 논쟁 을 피하려는 방법 뿐 아니라, 성서적 근본주의에로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1895년 2월 2일 아침 고든 박사가 서거하자 보스턴 선교훈련원 실행위원회는 학교명을 고든 선교훈련원으로 바꾸며, 실행위원회의 투표결과 만장일치로 피어선으로 하여금 고든을 후계하여 교장 직을 수행하기를 원하였다. 피어선은 친구의 유업을 수행하기로 합의하고 정식으로 교장직을 수락하였다. 그의 교장으로의 첫 공적 책임은 1895년 5월 종강식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는 일이었다. 아더 피어선은 1901년 퇴임하기까지 고든 선교훈련원의 이사회 참석이며, 졸업식 훈사, 「선교 비평」지를 통한 하교 선전이며, 성서 단기과정을 교수하는 일 등을 하였다. 그 후, 교장직에서 물러난 피어선은 학교의 고문으로 남아 있으면서 특별강사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고든 선교훈련원은 전도와 선교사업에 소명을 가진 이들에게 학비 없이 혹은 비용이 덜 들게 성서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클라랜던 스트리트 침례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1908년에 고든신학교는 뉴톤(지금의 앤도버-뉴톤의 일부인)신학교와 합병해서 몇 년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A. J. 고든의 이름을 딴 고든-콘웰신학대학원( 1991. 5월 평택대학교와 자매결연 체결)에서 가까운 매사추세츠주 웬함에 위치한 기독교 대학인 고든대학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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